나에게는 아주 길고도 화려한 이력서가 한 장 있다.경력서를 덧붙인다면 A4용지 3장은 꽉 들어찰, 한마디로 멋드러진 이력서이다.사람의 인생에는 세번의 찬스가 온다고 했던가...? 나머지 두번은 모르겠으나 첫번째 찬스는 눈에서 불이 번쩍할 만큼 똑바로 날아 왔고,나는 무의식 중에 통쾌하게도 장외 홈런을 날렸다.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쌀집 앞에 붙어 있던 93 대전 엑스포 도우미 모집 용지를 보고 재미삼아 내본 것이 뽑히게 되었고, 엑스포가 끝날 때는 1,200명 도우미 중에서 12명만 받을 수 있었던 최우수 도우미 상을 받게 되었다.내가 그 쌀집 앞을 무심결에 지나쳤더라면,마감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던 그 종이를 못봤더라면...모든 건 다 정해져 있었던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나는 지방의 이름없는 대학을 나와서 국어 선생님이 되어 있었거나 아니면,참으로 즐거움이 없는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다음은 물 흐르 듯 행운이 겹쳤다.엑스포가 끝나면서 참관했던 한국의 일류 업체들이 도우미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려고 눈에 불을 켰고,내게도 두,세 군데 굵직한 데서 오퍼가 들어왔다.실은,내가 있었던 관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그리고 그 사고는 꽤 나중에까지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3D 입체 영화에,극장 자체가 타원식으로 돌게 되는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때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이 3시간씩 기다려서 입장했는데 도중부터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하필이면,내가 영화관 진행을 맡고 있던 타임이었고,나는 부지불식간에 앞으로 나가서 사고가 났으니 기다려 달라는 멘트와 함께,도우미가 부르는 노래 한번 들어 보시라며 김수희의 애모를 열창했다.그 자리에 있었던 350여명의 손님들은 박수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고,이 사고가 가장 컸으리라.덕분에 오명 위원장과 악수를 하는 모습이 커다랗게 찍혀서 엑스포 기념 책자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방송국에서 취재가 오면 반드시 나를 내보냈다.내가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그렇다고 몸매가 잘 빠진 것도 아니고,얼굴이 꽤 잘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내가 순발력이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처음부터 나는 도우미에 뽑힐 재목이 아니었다.어쩌다가 우리 관을 맡게 된 이벤트 팀 담당자의 부인이 내가 다니던 대학 선배였던 것이 아마도 뽑히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행운이 행운을 불렀고,어느 순간 나는 나름대로 꽤 유명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엑스포가 끝나기도 전부터 모 방송국 리포터로 일을 하게 되었다.거기서도 나는 엉뚱한 짓을 했다.연고자도 없고,낯 설고 물 설은 땅에 왜 남으려는지 궁금해 하는 PD들을 설득했다.나는 어려운 환경에 나를 놓고 싶다고 말했다.돈은 차라리 내가 내면서라도 다니겠노라고 했다.결국,뽑히게 되었고 물론,돈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되었다.

[술회1--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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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참 좋다.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바보스러운 일인지,억척스러운 일인지 잘 모른다.똥물인지 보물인지 분간이 안되는 것이다.그러나,어떠한 상황이건 지켜보는 이는 반드시 있고,그 3인칭의 간섭자에 의해서 인생이 좌우되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어쨌거나,내가 일하는 모습은 다수에게 후한 점수를 받았고,더 나은 비약을 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나의 이력서의 마지막은 2003년을 전후로 빈공간이다.10여년에 걸쳐 정신없이 폭수를 늘여가던 이력서는 어느 계기를 깃점으로 멈추게 된다.그리고,현재까지 준비 중이다.앞으로 몇년이 더 '준비 중'의 여백으로 남게 될지는 모르나,나는 지금도 달리고 있고 앞으로도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