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예년에 비해 너무나 더웠던 여름도 끝이 났고,겨울이 되려면 아직 얼마간의 여유가 있는 계절.곡식과 과일이 무르익어서 지천에 먹을 것들이 쌓여 있는 듯한 풍성한 느낌의 10월이 돌아왔다.작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쌀 농사에 피해가 많았다고 하더니 역시,쌀값이 몇 백엔 오르고,브랜드 마이(米) 다,수입 쌀이다 해서 애꿎은 가계부만 탓을 했는데,올해는 쌀도 풍작이라고 하니 주부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무더운 여름을 잘 넘겼다고 상이라도 주듯,부드러운 가을 햇살에 단풍 구경을 떠나는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고,가을 운동회다 소풍이다 해서 어린 아이들의 마음도 덩달아 둥실 떠오르는 것도 이 계절만이 가지는 독특한 정취일 것이다.
소풍이나 운동회 하면 떠오르는 건 무엇이 있을까.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기억,절경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엄마가 정성스럽게 싸 주신 김밥 도시락……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억들을 담은 사진일 것이다.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싫어해서 카메라를 들고 다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설령,엄마 손에 의해 카메라가 들려졌다 해도,그저 가방 한 귀퉁이에 얌전히 넣어 두거나,한,두 장 건성으로 찍다가 말곤 했다.그래서,어쩌다가 찍힌 사진을 보면 어색한 웃음을 짓거나,수줍어서 아이들 뒤로 숨어 있거나,놀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내가 찍히는 것도 싫지만,누군가를 찍어 주는 것도 영 재주가 없어서 누가 찍어 달라고 카메라를 내밀면 질색을 하며 억지로 찍어 주곤 했던 기억이 있다.
앨범 정리도 너무 서툴어서 한장한장 곱게 책갈피에 끼워 넣어야 될 것을 여러 장 포개서 앨범 안에 박아 둔다던지,그러다 보니 사진끼리 붙어서 찢어지는 것도 다반사인데다,관리를 못하니 이사라도 한번 하고 나면 대체 어디로 숨어 버린 건지 찾아 낼 도리가 없어지곤 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기행문 중에 ‘사람들은 여행을 가면 카메라로 찍어 대기가 바쁘다.그래서 정작 눈으로 본 건 얼마 되지 않는다.여행이란 건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라,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이 말에 전적으로 수긍하며,사진이라면 질겁을 하던 내가 카메라를 안 챙기고는 외출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건,큰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이다.
한국에서 놀러 온 사촌 언니에게 동경 시내를 관광시켜 주다가 아키하바라에 간 적이 있다.언니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겠다고 했고,‘이참에 우리도 하나 장만하자’는 남편의 말에 그럴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구입을 했다.처음으로 큰아이를 카메라에 담았던 날,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희한한 느낌을 받았다.볼펜 끝을 입에 살짝 물고 귀엽게 웃는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건 말 그대로 감동이었다.아! 이런 느낌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게 되는구나!.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는 일반 필름 카메라와 달라서 색상도 선명하고 자동,수동의 조절도 가능한데다,무엇보다도 필름 값이 들지 않고 마음에 안 들면 몇 번이고 지웠다가 다시 찍기가 가능하다는 점이 매력이었다.게다가 인화할 필요도 없이 컴퓨터에 바로 연결해서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큰 아이의 임신을 확인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써오고 있는 육아일기에 사진이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겠구나……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실시간으로 아이의 커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꽤 매력적이었다.그 날부터 카메라 하나로 나의 생활은 변화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장난처럼 아이의 노는 모습을 찍기 시작해서,조금씩 아이의 숨은 표정을 찾아 내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고,자칫 지루하고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육아가 신나는 놀이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아이의 식사를 만들 때도 예쁜 접시에 담아서 온통 얼굴에 묻히며 먹는 모습들을 찍어대고,아이가 잠든 밤에는 열심히 편집하고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포토샵 책 한 권을 뗐다.그리곤,멍하니 아이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띄고 있으면,남편은 옆에서 “지호 환자”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아이가 둘이 되고 나니,사진 찍기 놀이는 더욱 재미가 난다.둘이서 놀고 있는 모습,토닥거리는 모습,웃는 모습들을 찍으며,한편 한편의 스토리를 기억하게 되고,사진들을 편집하면서 두 아이의 닮은 표정과 성장해가는 모습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큰아이는 이제 어린이 모델이 다 되었다.카메라를 들이대면 알아서 포즈를 취해 주고,간혹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받아서는 제 얼굴과,엄마와 동생을 찍고,엄마가 하는 것처럼 컵이나 나무,하늘을 담기도 한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핀트가 맞지 않던 사진들이 날이 다르게 실력이 늘어서 이제는 제법 어른이 찍은 사진처럼 멋지게 나올 때도 있다.나는 아이가 카메라를 원하면 언제고 넘겨
준다.떨어뜨릴까 걱정도 되지만,무엇이든 관심을 보이면 시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컷 찍도록 카메라를 맡겨두곤 한다.카메라 줄을 손목에 둘둘 감고 진지하게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확인하며 웃음보를 터뜨리는 큰아이를 보며,’이 녀석은 꽤나 카메라를 좋아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무엇이든 취미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 굳이 말릴 이유도 없다.
사진이 담긴 육아일기를 쓰며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우리 아이가 커서 철이 들면 엄마가 써왔던 자신의 육아일기를 들춰 볼 것이고,결혼을 하고 저도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 어떤 책보다 훌륭한 육아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었던 육아일기를 이만큼 쓰게 된 것도 다 홈페이지가 있었던 덕이고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틸 카메라를 그렇게나 싫어하던 나는 요즘 드물게 나 자신을 찍을 때도 있다.내가 나이 들어 가는 모습,지금의 나의 표정들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눈가에 주름이 보이거나,표정이 밝지 못하면 순간 주춤하며 놀라고 새로운 표정을 지어 보기도 한다.얼마나 예쁘게 나오는가 보다는 얼마나 나이답게 나오는가가 더 중요하겠지만,그래도 여자라서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큰아이에게 함께 찍자고 조르곤 한다.
그러면 큰아이는 언제나 기뻐하며 예쁘게 미소를 지어 주고 V사인을 그려 준다.큰아이에게 있어 엄마는 항상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자신을 찍던 그 모습으로 각인된다면 기쁘겠다.말을 안 들어서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칠 때의 무서운 표정은 다 잊어 주고,멋진 모습을 담기 위해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엄마의 진지함을 기억하게 된다면 참 좋겠다.그리고,훌쩍 큰 다음에 혹여 엄마가 곁에 없더라도 제 어릴 적 사진들과 일기들을 보며,엄마와의 달콤했던 기억을 되살린다면 더더욱 고마울 것 같다.
요즘 우리 아이들과 나는 “데이트 놀이”에 빠져 있다.큰아이가 어렸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놀이이다.카페에 가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큰아이는 딸기 요구르트를 먹으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놀이이다.우리 아이는 나의 커피 잔에 설탕과 프림을 넣어주고 오랫동안 저어 준다.순하디 순한 작은 아이는 우리 곁에서 과자나 빵을 먹으며 조용히 앉아 있어 준다.
큰아이에게 “호짱! 마마랑 데이트할까?” 하면,만 3살 된 큰아이는 제 손바닥에다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커피에 설탕 내가 타도 되지?”하고 묻는다.’물론이지……’아이와 나는 카페에 앉아서도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기뻐하고 순간을 만끽한다.역시 즐거운 육아를 위한 우리 가족의 준비물에는 카메라가 빠질 수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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