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연재중인 글입니다]
일본의 8월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하나비(花火.불꽃놀이) 축제가 유명하다.습기가 많고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일본의 여름,소나기가 허둥지둥 쓸고 간 자리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하나비 축제를 보러 나선다.
여자들은 손부채를 들고,잘 말라서 기분 좋게 까슬거리는 유카타를 걸치고,머리를 가볍게 틀어서 올린 머리를 하고,남자들은 머리에 흰 타올을 두르고 개중에는 제법 멋지게 파랗게 올이 굵은 유카타에 게타(下駄)를 따각거리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표정에는 이제 곧 만개한 모란처럼 피어 오를 불꽃에 대한 기대감과,열심히 일한 다음에 오는 유유한 느긋함이 배어난다.
일본의 여름,도대체 몇번을 지나쳐 온 일본의 여름인가.학생 시절에는 방학이면 그동안 학교에 다니느라 소홀히 했던 아르바이트를 중점적으로 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쁜 매일을 보냈고,어쩌다가 휴일이면 모자란 잠을 보충하느라 어디엔가 놀러 갈 계획을 세워 보지도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인지 여름하면 떠오르는 추억은 온천,여행,사진 등등이 아니라,동글동글 말려서 여름 한철 텔레비전 CM을 장식하는 피우는 모기향과,편의점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불꽃놀이 종합 세트,늦여름의 나른한 오후에 가느다란 바람을 타고 간간이 들려오는 유리 풍경의 딸랑 거리는 소리 정도이다.하지만,이 정도의 추억만으로도 올 여름도 즐거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조그맣지만 나름나름의 소중한 추억들이 도처에 알알이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하나비 축제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게 된 것은 딱 10년 전의 일이다.나는 카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일본어 학교 시절을 보냈는데,바다와 강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여름이 오기도 전에 편의점마다 경쟁을 하듯 하나비가 놓여 있곤 했다.한국에서도 불꽃놀이 기구를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경한 적은 있지만,일본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다는 것도 일본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그리고,7월 말부터 8월 말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하나비 축제에 관한 뉴스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그 축제의 숫자와 동원되는 인원의 어마어마함에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으로 타마가와 강변에서 벌어지는 하나비 축제를 보기 위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던 도중,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까 싶게,인도 한가득 사람들의 물결이 마치 한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비가 내려 더욱 짙푸른 신록이 아직도 촉촉한 타마가와 강변의 풀밭에는 피크닉용 비닐 자리가 잔뜩 깔리고,사람들마다 비닐 종이에 맥주와 먹거리들을 잔뜩 담아 와서는,아무 거리낌없이 목소리를 높여 웃고,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었다.무엇이든 행렬을 지어 기다리는걸 즐기는 듯 보이는 일본 사람들은,이날도 하나비 축제가 시작되려면 한시간 남짓 남았는데도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가설무대를 중심으로 잘 보이는 자리는 벌써 빼곡이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을 선두로 친구들이 여럿 모인 우리 팀도 남들에게 질세라 비가 걷힌 자리에 우리들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두근두근 설레는 기분으로 하나비가 하늘에 걸리기를 기다렸다.하나비에 앞서 가수들의 공연,일본의 풍물인 와다이꼬(和太鼓) 공연에 이어,예정보다 30분이나 늦게 시작한 하나비는 오기를 잘했다 싶게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있는 힘껏 뒤로 젖히고 통통 템포 좋게 터지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마치 어린 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불꽃이 터질 때마다 풍겨오는 독특한 화공약품 냄새에,’치이익~~’ 하고 불꽃이 사그라들며 내는 소리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추억과 여운이라는 선물을 남겨 주었다.
일본인은 하나비(花火)와 사꾸라(櫻),단가(短歌)를 좋아하는 민족이다.”팟~!” 하고 피어나서 “삿~!” 하고 져버린 다음에 남는 일순의 정적을 즐긴다.마치 인생사 같기도 하고,순간의 젊음 같기도 한 그런 아름다움을 사랑한다.우리 민족이 끈끈한 정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무궁화와 십장생을 사랑한다면,일본인들은 순간의 아름다움과 질 때의 그 흩날림,정적들을 사랑하는 민족이다.겉모양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미에 대한 추구는 바로 이러한 잠재된 의식 속에서 표출되어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의 사꾸라와 하나비를 보며 느끼는 교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아마도 우리 몸속에 흐르는 ‘필 때 피어나고,질 때 지는’ 자연의 섭리를 사랑하는 마음,판소리 가락의 온유한 여운의 미,수묵화에 떠오르는 오롯한 여백의 미 등을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이리라.같은 아시아의 민족으로 태어나 본바탕에 흐르는 동양적인 아이덴티티가 교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 게다.
일본인들의 생활 패턴을 보면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일할 때는 일밖에
모르다가도 일이 끝남과 동시에 미련 없이 자리를 떠버린다던가,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독특한 취미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휴가가 주어지면 당장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그것들이다.마치,이 순간만을 위해서 일했다는 듯,이들은 여행과 취미생활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일본의 줄을 서서 기다리는 문화도 이것과 비슷하다.유명한 일품 라면 한 사발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그렇게 기다려서 마주 대했을 때의 감동을 소중히 여긴다.축구나 야구를 보기 위해서 밤을 새고 경기장 앞을 지키는 건 보통이며,프리미엄 티켓을 구하기 위해서 몇 날 며칠을 텐트 생활조차도 불사한다.
보기에는 순하고 정적(靜的)인 일본인들의 이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한국인들을 보고 흔히 엄청난 바이탈리티를 가진 민족이라고들 하지만,취미생활을 위한 일본인들의 열정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물론,한국 사람들중에도 취미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은 적지 않지만,한정품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좋아하는 물건을 수집하는 데는 일본 사람을 따라 갈 민족이 없는 것 같다.
일본에 사는 사람들 중에 재일 교포들이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이런 재일 교포들 또한 취미생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걸 보게 되는데,그렇다면 그건 민족성 자체의 특징일수도 있지만,환경에 의한 습득,서로 닮아 가려는 집단 의식,사회생활을 통한 반복학습에 의한 적응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도 어김없이 일본 각지에서는 하나비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30분 남짓 열리는 하나비 축제에 가기 위해 몇시간동안 자동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연인의 손을 끌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가족들과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사람들,친구들과 피크닉을 즐기는 기분으로 놀러 나오는 이들……모두가 하나비가 하늘에 떠오르는 그 순간만큼은 똑 같은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팟~!” 하고 피어나서 “삿~!” 하고 져버린 다음에 남는 일순의 정적을 즐기며 아~! 산다는 것은 이렇게 즐거운 것이로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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