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연재중인 글입니다]
2005년의 새해가 밝았다.올 한해는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지난 해에 여러 차례 사람들을 괴롭혔던 태풍과 지진 등은 새로운 해에는 찾아와 주지 않기를 바라며 즐겁고 뿌듯한 상상만을 해 본다.새하얀 노트에 또박또박 일년의 계획도 세워보고,작년에 제대로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일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작심삼일이면 어때?.뭐든지 한번 해 보겠다는 데 의의가 있다.전혀 시도도 하지 않고 입으로만 끝내는 것 보다는 몇 배나 생산적인 시도인 것이다.
나는 겉보기에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성격을 못내 아쉽게 생각해 왔다.뭘 하더라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이래저래 계획만 하다 포기하고,행동반경 안에서는 열심히 움직이지만,그 행동반경을 넘어서 보려는 용기도 관심도 없었던 것 같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외향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용기가 너무 없어서 공원에서 일본 엄마들과 마음 편하게 사귄다거나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우기기도 했지만),멀리 있는 지인의 집까지 출동을 해본다거나,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들은 계획표 안에서 잠만 재우고 있는 것이다.우물 안 개구리가 또 그 우물 안에다 작은 홈을 파고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랄까,어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극적인 사고로 여태껏 살아왔던 것 같다.
육아와 가사라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들,청소를 하고 나면 5분을 못 견디고 이전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아이들,열심히 요리를 해서 식탁을 꾸미면 반도 채 먹지 않고 디저트로 눈을 돌리는 아이들,요리의 레파토리도 한정되어 있어서 노력해야지 싶으면서도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외식을 하면 내가 만든 요리와 별반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나름대로 잘 먹어 준다.집에서 그렇게 좀 먹지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아아……아이들이 얄미워질 때도 있다.접시 하나만 바꿔도 기분이 달라지고 바깥 공기를 쐬며 먹는 식사가 나부터도 더 맛이 있지만 그래도 약간의 서운한 감정은 남는 것이다.도대체 주부라는 것이 직업인가.언제부터 나는 내 이름이 주부가 되어 버렸나……
아는 사람 중에 학교를 다니고 있는 주부가 있는데 나더러, “아아…전업주부는 참 좋겠어요.24시간을 아이와 남편에게만 쏟을 수 있으니…나도 학교만 안 다니면 지금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예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그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미미한 쇼크를 느꼈던 것 같다.
왠지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듯한 느낌.나와 함께 학교를 다니다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그 사람은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해서 공부를 계속하고,나는 말하자면 중도 하차인 셈이다.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열심히 일을 하면서 가사일도 해내는 억척 엄마였지만,이제는 본업이 주부이니 열심히 솥뚜껑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그러고 보면 나 또한 일말의 불만에 가까운 불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원래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만,참 기가 죽는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누구나 하는 육아에 누구나 하는 주부노릇이지만,요즘은 이왕 하려면 한번 즐겁게 해보자라는 생각이 든다.새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 커다란 계기가 된 것 같다.너무 바빠서 철야를 밥 먹듯 하는 남편에게 부탁할 수 없으니,집안 구석구석 줄자로 이리저리 재고 다니면서 빈공간에 들어갈 알맞은 사이즈의 조립식 가구들을 사 와서,손수 드라이버로 조립을 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손바닥이 빨갛게 될 정도로 나름대로 고생해서 만든 조립장들은 지금 얼마나 유용하게 잘 쓰이고 있는지 모른다.게다가 요즘 조립식 가구들은 여자가 조립해도 될 만큼 쉽고도 간단하게 만들어져 나온다.가능한 한 심플하고 깔끔한 것을 즐기던 취향이 아이들의 눈에 맞추면 어떤 모양이 좋을까를 생각하게 되고,식탁보나 커튼 하나만 해도 즐거움의 재료가 되고 소박한 여유로움을 전해 준다.
항상 바빴던 엄마 밑에서 자란 터에 간단하고 스피디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선호해 왔던 나지만,집에 있는 전자레인지나 오븐을 풀이용해서 좀 더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도 한다.아이들의 간식거리나 빵,과자 등을 집에서 만들어 먹이는 엄마들 너무 멋있지 않은가! 자신의 요리 만드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으며 홈페이지에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엄마들도 훌륭하다.
가끔은 너무 지겨워서 쳐다보기도 싫은 요리나 가사가,즐거움의 스파이스를 곁들이면 너무 재미있는 가사 놀이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어떤 사람들은 밥하다 말고 사진 찍고 대체 뭣하는 거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반복되는 일상의 틀 안에서 가능한 한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 멋진 주부 라이프의 지름길인 것을……
또 하나,예전부터 쭉 생각해 왔던 것이 하나 있는데,일본에 사는 한국 엄마들의 좁은 행동반경에 관한 것이었다.동경에만 해도 한정된 지역에 묶여서 밖으로 나가기 힘들어 하는 한국 주부들이 너무나 많다.아이들에게는 한국말을 먼저 가르쳐야 하나,일본말을 먼저 가르쳐야 하나,한인학교나 인터내셔널 스쿨도 있지만 역시 집에서 가까운 평범한 학교에 보내야 하나,언제까지 일본에 살지도 모르는데,굳이 일본인 엄마들과 교류를 가져야만 하나 등등…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아도 당사자들에게는 어려운 문제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헤쳐 나가기야 하지만,그러한 문제들을 상담하고 서로 의논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었다.몇몇 일본에 오래 거주하신 분들이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모임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지만,역시 한번 찾아가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는다.2005년에는 내가 그런 모임에 참가를 하던지 아니면,한국 엄마들이 모일 수 있는 모임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실현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들겠지만 가까운 곳에 사는 주부들만이라도 모여서 필요 없는 일용품이나 장난감을 교환하고,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일본에는 여러가지 이벤트가 아주 많이 열리는 것 같다.우선 주말과 휴일에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다.리사이클 운동 시민의 회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매 주말과 휴일의 벼룩시장 개최지를 소개하고 있으며,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신청을 받아주고 있다.
집 근처의 벼룩시장에 들러서 한국의 시장과 같은 열기를 느껴본다던가 아니면,필요 없는 물건들을 들고 나가서 직접 장사를 해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버릴 물건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스트레스 해소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나도 올해는 두 아이들을 남편에게 떠맡기고 친구와 함께 벼룩시장에서 떼돈을 벌어 보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힘들어도 나누면 반이 되고,받아주면 그만큼 무게가 덜해지는 법,힘겨운 육아나 가사를 주부 혼자서 고민하고 해결하게 두지 말고,가족들도 약간의 힘을 빌려 준다면 더 멋진 주부,더 멋진 엄마에 더 멋진 여성으로 거듭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곁들여서 새해 소망으로 걸어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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