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생활한지 어언 8년째,
8년 전만 해도, 내가 처음 터전을 마련한 가와사끼에서 신라면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지만,일본어 학교까지 가는 버스비가 아까워서 왕복 2시간을 걸어다니던 우리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참, 그 시절 생각만 하면,,,,,,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도 살았을까 싶다.
한국에서 트렁크 3개에다 꽉꽉 밟아서 더이상 들어갈 틈이 없게 만들어 온 짐들은, 풀어 놓으니 별 것도 없다.신라면 1박스를 낱개로 하나씩,짐사이에다 군데군데 박아서 가지고 왔더니,금같은 김치에,금같은 고추장과 더불어 공동 보물 1호로 애지중지,너무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싱크대 제일 윗서랍에다 고이 모셔 두었다.
신라면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
우리가 처음 왔던 그 해는 환율이 14;1이나 되어서 한국돈이 돈이 아니었다.가와사끼가 시골이어서 더 그랬겠지만,우리들은 밤마다 큰 맨션의 쓰레기장을 뒤져서 텔레비젼이나 냉장고를 줏어다 나르고,작은 서랍장이나 기타 등등,쓸만하다 싶으면 뭐든지 집으로 갖다 나르곤 했다.
나름대로 재미있기도 했지만,참 서글픔이 많았던 시절이었다.그해는 어찌나 비도 많이 오는지,아침에 말짱하던 하늘이 학교가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폭우가 쏟아지다가,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치고는,또 쏟아지고.덕분에 거의 매일을 우산을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싱크대 맨윗 서랍에 고이고이 모셔 둔 신라면은 가끔 몸이 아프거나,도저히 한국음식이 그리워서 환장할 것 같을 때,한 번씩 끓여 먹는 아주 귀한 음식이었고,비가 마구 사정없이 내리는 밤이면,룸메이트 은주와 가스렌지 불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찍소리도 안하고 라면 물끓는 소리를 열심히 듣고는 했었다.
일본에 온지 한달 반째 되던 어느 날,같은 학교 친구 두명이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 아르바이트 구했어!"
그날 밤,아이들이 우리 집에 모였고,우리는 맥주 2병이랑,신라면 2개를 끓이고,한국김을 앞에 놓고는 축하파티를 벌였다.
진수성찬이었다.ㅋㅋㅋ*^^*
맥주가 얼마나 마시고 싶었는지,신라면을 배터지게 먹고 싶다고 얼마나 곰곰히 생각했었는지 모른다.맥주 2병을 조그만 밥그릇에다 조금씩 부어서 돌아 가면서 마시고,냄비한개를 중간에 놓고 서로 양보해 가면서 한,두줄씩 라면을 먹었다.어쩌다 세줄쯤 젓가락에 걸리면 미안해 하면서도 누가 볼세라 얼른,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동경으로 나와서 살게 되었는데,어찌된 일인지, 가와사끼에서는 그렇게 귀하던 신라면이, 동경에서는 어딜가나 편하게 살 수 있는 음식이 되어 있었다.웬만한 수퍼는 물론이고,동네 편의점에 가도 라면코너에 턱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 빨간 봉다리의 신라면이었다.
특히, 우리 동네 데일리 마트에서 신컵라면을 처음 본 날은 감격 그 자체였다.그 자리에서 신컵라면을 4개나 사들고 돌아와서,된장찌개 먹으려고 사온 두부는 냉장고에 모셔두고 뜨거운 물을 부어 그 자리에서 한개를 다 먹었다.나머지 3개는 다음 날,아르바이트로 일하던 면세점에 가지고 가서 나도 하나 먹고,일본 아이들에게 먹어 보라고 한개씩 주었다.
나는 아직도 신라면이 좋다.그렇게 물리게 먹었으면서도 아직도 부모님이 가끔 한박스씩 보내 주시면 김치도 썰어 넣고,파도 송송 썰어 넣고, 냉동 매운 고추도 썰어 넣고 해서 한 번에 두개씩 끓여 먹는다.
신라면 하면 역시,스프안에 한 두개는 꼭 들어 있는 눈에 띄게 굵은 고춧가루를 잊을 수 없다.라면을 다 먹는 동안,내내 냄비속의 그 존재감있는 고춧가루를 노려 보면서 요놈이 아직도 남아 있었군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맛난 재료를 넣고 끓여도,일본어 학교 시절의 그 맛은 따라갈 수가 없지만,그래도 추억의 빨간 봉다리가 참 많이 날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 같으다.
이젠 가와사끼에도 신라면이 많다.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정말 세월이, 강산하나가 바뀔만큼 변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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