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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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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몸살
오늘은 한여름처럼 덥다.따뜻한 걸 넘어서서 반소매를 입어도 땀이 날 것 같다.
호짱은 산보 갔다와서 열심히 자고 있다.반소매에 기저귀만 채워놨는데도,자고 있는 얼굴이 바알갛게 상기되어있다.

명아가 아기를 낳고,숙이언니의 하연이 탄생비화를 읽으면서,쓰긴 써야 하는데하면서 계속 미뤄왔었던 내 생애 제일 아팠던 기억을 적어볼까 한다.


작년 여름은 많이 더웠다.임신을 해서 몸무게가 18kg까지 쪘던 나에게는 더더욱 더운 여름이었지만,호짱을 낳고나서는 한 겨울 옷을 입어도 이가 덜덜 떨리는 추운 여름이었다.

호짱을 임신한 걸 알았을 때만해도,암으로 투병중이시던 시아버님은 건강하신 편이었고,이미 그 때 햇수로 4년이 넘는 늑골종양이라는 암과 싸움을 하고 계셨다.

무서운 호랑이같으신 아버님은 나를 큰 며느리라고 참 많이 예뻐해 주셨다.예전에는 너무 무서우신 분이라,함부로 말도 못 붙이는 분이셨다고 했다.

장남인 남편은 밀양 박씨 문중의 종손이고,아버님도 종가의 종손이셨기 때문에,유독 남편에게 엄하게 대하셨다고 한다.남편이 호짱만 했을 때,아버님이 무서워서 큰 소리로 울지도 못했단다.

그런 마음때문인지 워낙 효자라서인지,어머니는 늘 남편을 못잊어 눈물을 보이곤 하신다.

남편의 가족들은 병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처음 집안에 큰 슬픔이 온 것은 남편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머니가 포상기태(일종의 암과 같은 병)으로 판명이 나고,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안봐도 환한 일이다.남편은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겠다며 고등학교를 휴학해 버렸고,한창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 할 시기에 집안에만 붙어 있는 아들이 너무 안되 보이신  어머니는,남편이 그 당시 너무 좋아하던 기타를 사 주시고,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학원과,댄스학원등에  보내 주셨다.

지금은 엉덩이를 흔들며 이상한 아저씨 춤을 추는 남편이지만,그 당시에는 힙합에 브레이크 댄스가 특기였다고 하니 정말 못 믿을 노릇이다.

온 식구들의 노력으로 어머니께서는 병마와 싸워서 기적적으로 일어나셨고,남편은 남들보다 늦깍이로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자신이 좋아하던 대학의 방송연예과에도 무사히 합격하였다.

어머니는 포상기태와 자궁암을 앓으셨다.두 번다 기적적으로 소생하셨지만,지금도 안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몸을 하고계신다.그런 어머니께 호짱을 6개월이나 맡겨둘 수 밖에 없었던 건,작년에 우리에게 닥친 큰 시련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남편은 나를 세 번째 만나던 날,프로포즈를 했었다.
나는 이런 어이없는 남자가 다 있나 싶었지만,나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프로포즈를 했던 남자는 이 남자가 처음이라,나도 모르게 네~~하고 대답했었다.

콧대높고,까다롭고,결혼은 안중에도 없던 신송아가 이 남자의 말 한 마디에 그냥 결혼하자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아버님이 병환중이다.언제 돌아가실 지 모른다.아버님께 큰 며느리를 보여 드리기 위해 솔직히 선도 몇 번 봤다.하지만,다들 인연이 아니었다.너랑 결혼하고 싶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연락해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다고 알렸고,시아버님이 되실 분이 위독하셔서 되도록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했다.

상견례에서 만난 양가 부모님은 자식들의 결혼문제는 안중에도 없고,서로 의기투합해서 놀러 갈 계획부터 세웠다.

서로 너무 마음에 들어했고,긴장하고 있던 우리는 그게 너무 기뻤다.상견례가 끝난 후,처음이나 마찬가지인 데이트를 하며,노래방도 가고,카페에도 가고,신나게 걸어 다니고 그랬다.

여동생이 결혼하고 난 두 달여 후,나는 남편의 고향인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엄마는 나를 결혼시키지 못해 애를 태웠었다.내가 결혼에는 전혀 무관심한 것 같으니  속상해도 하셨다.억지로 선도 보게 하려고 애를 쓰고 했지만,
내 마음이 안 움직이니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던 날,결혼식장에는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나는 밖에 있었다.시집도 안 간 언니가 동생의 결혼식장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했다.

이제 두 달후면 나도 결혼을 하니 망정이지,애인도 없었다면 참 서글프리라 싶었다.


결혼했던 해, 우리는 둘 다 4학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방송국에 취직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내 뜻대로,마침 어떤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고,이제 고용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정말 황당했었다.일을 너무 하고 싶었던지라 나는 일주일간을 미미한 충격에 빠져 지냈지만,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호짱이 까만 점처럼 찍혀있는 걸 보고는,그 동안의 미련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취직은 포기했지만,대학원 수속을 밟고,또, 그 방송국에서 가볍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입덧을 안하니 무엇을 먹어도 맛이 있고,마음은 너무 편하고,내 몸에 새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나는 호짱을  낳던 그 날까지도 호짱이 뱃속에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계속 그렇게 배안에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다.

봄이 되어 날이 조금씩 따뜻해질 때 쯤,아버님의 병환이 갑자기 위독해지셨다.

호짱을 일본에서 낳으려고 마음 먹고 있던 나는 학교도 나 몰라라,한국으로 쫓아  나갔다.아버님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안 좋으셨고,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병환중에도 혈색이 건강한 사람처럼 좋으셨던 아버님은 살도 많이 내리시고 그냥 하얬다.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서 아이는 친정에서 낳기로 하고는,친정과 시댁을 2,3일에 한 번씩 왔다갔다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아이가 태어나려면 아직 많이 이른데다,너무 밑으로 내려와서 움직이면 안된다고 의사가 주의를 주었지만,그렇게 편안히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임신중에 참 많이 움직였었다.많이 걸어 다니고,방송국의 정보검색 아르바이트도 하고,그 방송국의 새로운 사업준비를 위한 모 대기업과의 프레젠을 맡아 하고,서류 번역일을 하고,음악작업도 했다.

남편은 날더러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나는 한 가지 일을 맡으면 자진해서 10가지 일을 해 주는 성미인지라 항상 바빴다.

결국,아이가 태어날 예정일을 일주일 남겨두고 호짱이 태어났다.양수가 먼저 터져서 나는 내발로 입원수속을 밟고 입원했다.

남편은 내가 혹시나 싶어 적어 둔 옹알이 일기를 읽고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고 한다.눈물많은 남자이다.호짱의 아빠는.사나이중의 사나이지만 어떨 때는 내가 더 대범할 때도 있다.  

어쨋든 무사히 태어난 호짱을 보러 어머니가 올라 오셨다.아버님도 아이가 보고 싶으셔서 눈물을 보이셨다고 하셨다.아버님은 내 앞에서 자주 눈물을 보이셨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장미 화환을 부산에서부터 사 가지고 들고 오셨다.

호짱이 태어나기 얼마 전, 아버님이 의식을 잃으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내가 부산에 있을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불과 며칠 만의 일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호짱이 태어나자 아버님은 희미한 의식을 부여잡고,철학관에다 부탁해서 호짱의 이름을 지어주셨다.엄청난 사주를 타고 태어난 호짱을 위해서 아버님께서 주신 마지막 선물이었다.  

호짱은 태어나고 일주일 후,황달로 입원을 했고,이미 의식이 없는 아버님은 내가 찍어서 보내드린 호짱의 사진을 보시면서 "지호.......지호......"하셨다고 한다.

호짱이 퇴원을 하고,나도 조리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후,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아버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호짱을 데리고 내려 오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호짱을 안고,막내 여동생과 동생의 남자친구인 도씨를 끌고 부산으로 바로 내려갔고,아버님은 그 다음 날 돌아가셨다.

아마도 호짱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아니,큰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으셔서 억지로 참으신 것 처럼 호짱의 얼굴을 보자마자 편안하게 눈을 감으신 것 같았다.

일본에 혼자 있으면서 속을 있는대로 태우던 남편은 이 전갈을 듣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유학비자에서 취업비자로 바꾸고 있던 중이라,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고 있던  차에 일을 당한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다음 날,남편은 회사 사장님과 함께 입국관리국에 갔다.아버님이 돌아가셔서,상주인 내가 나가야 한다.도와달라.

결국,절대 안됀다는 대답이 돌아와서 남편은 그 자리에서 출국 신청을 하고,외국인 등록증을 반납한 후,나리타로 쫓아가서 마지막 비행기를 겨우 탔다.

그 때,한국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입관을 해야 하는데,상주가 없으니 큰 일이 난 것이다.상주가 오늘 안으로 올 수 있을 지도 의문이지만,만약 못 오게 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호짱을 동네 할머니들에게 맡겨 놓고,젖을 짜서 우윳병에 넣어  먹이도록 한 후,계속 영안실에 있었다.옷은 젖이 흘러 넘쳐서 바지까지 다 젖고 여름이라 온 몸에서 냄새가 났지만,갈아 입어도 계속 흐르는 젖 때문에 금방 또 옷을 다 버리게 되었다.

남편은 무사히 비행기를 탔다는데,비자를 포기했다고 한다.그 때는 솔직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어서 빨리 남편이 아니 ,상주가 도착하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

남편에게서 지금 비행기를 탔다는 전화를 받고,비자를 포기했다......미안하다......잘 될거다.......라는 이야기를 듣고,나는 남편에게 격려를 했다.다 잘 될거야...어서 빨리 오기만 해 줘......

전화를 끊고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오다 동네 아줌마에게 들켰다.그 아줌마는 나중에 어머니에게 그 때 내가 울더라는 이야기를 했다.어머니는 옷자락으로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셨다.

남편은 저녁 6시 55분 비행기를 탔고,인천에 도착하니 9시가 다 되어 있었다.거기서부터 총알택시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니  탈상 30분전이었다.

선산까지는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인지라 30분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탈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남편은 택시를 타고 내려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목소리가 다 갈라지고,얼굴이 딴 사람같았다.

산에 갈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인 새벽 3시 반.

영안실안은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고,나는 호짱과 함께 산에 가려고 아이까지 데려다 놓고 상복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남편이 뛰어서 들어 오자,영안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 일어서며 통곡소리가 터졌다.그렇게 큰 소리가 갑자기 나는데도 호짱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잘 자고 있었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모든 일이 끝난 후,남편의 취업비자를 새로 신청했다.

하지만,갑자기 들어오게 된 남편대신 처리해야 할 문제들도 많았고,집세나 세금등등의 자질구레한 일들도 처리해야 하고,호짱의 비자도 신청하기 위해서 나는 혼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젖을 끊기위해 병원문을 들어 서던 날,나는 서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렇게 양이 많은데 이걸 다 먹이면 호짱이 얼마나 건강할까.아무렴 엄마 젖보다 나은 음식이 또 있을까.내가 우니까 남편은 울지 말라며 옆에서 달랬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은 후,돌아서자마자 젖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자,찌릿한 통증이 온몸에 퍼지고 몸이 나른해졌다.나는 약을 먹고 물은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다가 너무 거센 통증에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하지만,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그렇게 아프긴 내 생애 처음이었다.아기를 낳는 고통보다 더 무서운 통증이 있었구나!나도 모르게 눈이 풀리고 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으로 신음소리가 절로 새 나왔다.그래도 시댁인데 체통은 지켜야지 하면서도 내몸이 내 의사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옆에 와서 말을 시키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다.말을 하려해도 말이 잘 안 나온다.

남편은 사색이 되어서 날 쳐다보고,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한 동서는 "괜찮아요 ?형님?"을 연발하고,시어머니는 "니가 젖몸살에 지금까지의 피로가 겹쳐서 더하다"하시면서,인삼을  달이고,엿질금을 달여서 먹여 주시고,양배추를 찧어서 가슴에 부치고,미역을 붙이고,그것도 모자라 약국에 쫓아가서 약을 사 오셔서 주시고,죽을 끓이시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아픔이 덜했던건지 어떤지는 모르지만,미역을 붙이고 붕대를 감은 가슴이 얼굴높이까지 부풀어 올라 있고, 통증때문에 나는 몇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방에 가서 칼을 가져 와,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런데,이 젖몸살을 나는 일본에 와서 다시 한 번 더했다.왜 그렇게 양이 많은건지!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이 끼친다.

젖몸살덕에 물종류,국종류가 못 먹게 되어 버렸는데도,일본으로 건너와서 일주일쯤 지나자,다시 젖이 도는 느낌이 오더니,급기야는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무서웠다.이 병원 저 병원에 전화해서 약을 줄 수 있냐고 물어 보니,그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가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며칠을 병원을 찾아 다니다가 어느 중국의사가 하는 산부인과에서 주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자, 겨우 젖몸살이 잦아 들었다.

젖몸살이 잦아들자,나는 탄원서를 들고 입국관리국을 찾아 다녔다.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겁이 많은 나는 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고,집안에 있던 모든 형광등을 새걸로 바꿔서 24시간 항상 켜 놓고 살았다.밖에 나가서 집에 돌아올 때면 무서워서 집안을 다  살피고 다니고,집안에 있을 때는,혹시나 바깥에서 인기척이라도 나면 무서움에 몸을 떨었다.

그렇게 보내기를 두 달여,남편의 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고,지금처럼 생활의 안정을 찾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둘째를 곧 가져야 한다.하지만,나는 젖몸살이 너무 무섭고 겁난다.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아픔에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애 가장 아팠던 기억이고,다시 생각하기도 싫지만,그래도 이것도 하나의 추억인데,먼 훗날 다시 이 글을 보며 조용히 웃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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